[BOOK 돋우다]보통의 삶을 충실히 살아내는데서 분출되는 힘 -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정확하고 완전한 사랑의 기억




 


박완서 샘은 내가 아는 작가 중 가장 우리말 어휘를 풍부하고 유려하게 다루는 사람이다. 한때 그의 작품을 읽으며 우리말을 공부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먹었을까?> , <나목>, <엄마의 말뚝>, <친절한 복희씨> 등 소설도 너무 좋지만 나는 박완서샘의 에세이를 사랑한다.


진실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좋은글, 오늘 내게 있었던 작은 일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뭐라도 찾아내고야마는 섬세함과 따뜻한 시선, 추억과 아픔까지 버무린 글에 얼마나 위로받고 공감했는지 모른다.


아름다운 글의 박완서 샘 에세이에서 그러나 제일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참척의 고통’ 이다. 처음 이 말을 접했을때 무슨 뜻인지 몰라 사전을 찾아봤던 기억이 난다.


참척: 자손이 부모나 조부모보다 먼저 죽는일.


다 큰 아들을 먼저 떠나 보낸 심정이 어땠을지 감히 짐작도 가지 않는다.

딸 호원숙의 ‘엄마 박완서의 부엌이야기’ 에서 만두 이야기를 읽었을때도 매우 가슴아팠다.

동생은 유난히도 만두를 좋아해서 엄마가 만든 만두는 얼마든지 먹을 수 있다고 했단다. 그런 동생이 떠나고 얼마지나지 않아 새해가 되어 만두준비를 하는데

“만두 박사가 없는 데 무슨 재미로 만두를 만드냐” 던 엄마 박완서를 기억하고 있었다.


살고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던 당시의 심정을 토로하는 내용이 여러 에세이에 등장한다. 그 고통도 글쓰기로 견딜 수 있었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래서인지 딸은 그 시절 엄마의 일기가 너무 슬퍼서, 고통을 이겨내는 과정이 너무 서글퍼서 잘 읽지 않는다고 했다.


그럼에도 박완서는 말한다. 시간이 치유못할일은 없고, 신은 감당할 시련만 주신다고, “때로는 죽음도 희망이 되는것은 희망이 없이는 살아있다 할 수 없기 때문이” 라는 말이 한편으론 먹먹하면서도 한편으론 삶의 희망을 느끼게했다.


타계 10주기를 맞아 엮은 이 에세이 집은 다시 봐도 따뜻하고, 전에 읽을때와는 다른 지점에서 감동적인 박완서 글을 만나게 해주었다.


그리고 띵 시리즈로 만난 딸의 글을 연이어 읽으며 엄마 박완서의 온기가 느껴지는 부엌과 음식도 마주할 수 있었다.



박완서샘 에세이에 음식이나 요리법 등이 자주 등장해서 끼니를 정성껏 챙기는 엄마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 많은 글을 쓰면서도 보통의 삶을 충실히 살아낸 박완서 샘의 일상을 딸의 글로 읽고 있으니 참 좋았다. 작품에 등장하는 음식이야기를 인용으로 등장시켜 같은 음식에 대해서 딸과 엄마(또는 며느리)의 입장과 기억차이를 비교하며 읽을 수 있는것도 좋았다.


딸이 기억하는 음식엔 언제나 엄마(박완서)와 두 할머니의 사랑과 정성이 있었다. 음식 뿐 아니라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과 뭐든 과한것을 싫어하는 성격도 읽을 수 있었다.


15p 어머니는 음식을 많이 차리는 것을 싫어했다. 지나친 것을 싫어하는 성정과도 통하는 것이지만 음식을 많이 하거나 가짓수가 많으면 무슨 맛인 줄 모르겠다고하며 음식이 남게 될까 지레 걱정을 하셨다. (…) 맛있는 것을 굳이 따라다니거나 집착하지 않는 넉넉한 여유를 따르고 싶다.


15p 살아 있는 동안 더 정성을 들여 음식을 해야지, 부엌에서 더 즐겁게 시간을 보내야지, 그러려면 몸과 마음을 더 건강하게 만들어야지, 하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들게 되었다.


14p 엄마의 치맛자락에 늘 희미하게 배어 있던 음식 냄새는 여지껏 나를 지탱해주는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안온한 사랑의 힘이 되었다.


집밥, 엄마밥에서 느껴지는 가장 편안하고 안온한 사랑의 힘! 그게 뭔지 알것 같았다.

산해진미를 먹어도 밖에밥에선 느낄 수 없는 느낌! 그 힘으로 뭐든 할 수 있을것 같았던 적이 있다. 나도 우리엄마가 떠올랐다.



두 사람의 입을 빌려 내 감상을 이야기 할 수 있을것 같다.


(매일의 끼니를 챙긴다는건) “지난하지만 숭고한 노동이자, 유연한 돌봄이자, 삶에 대한 원초적 의지이기도 하다”는 이 책의 에디터의 말과,


마감 시간이 급하고 할 일이 많던 어느날, 그럴 시간이 없는데도 갑자기 편수만두를 빚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정세랑 작가가 한 말.


149p “이 감미로운 책을 통해 그날의 충동을 뒤늦게 이해했다. 입에 들어갈 것을 정히 만들며 손끝에 힘을 주면 세상의 속도에서 벗어나 자신의 속도를 찾게 되는구나, 훈기 깃든 장마다 확인할 수 있었다. 마음속에 어떤 장면이 그려졌다. 누구도 따라할 수 없이 몰입을 이끌어내는 글을 쓰시던 박완서 선생님은, 그런 글을 쓰기 위해 깊은 내면에 자주 잠기셨겠지만 절대 매몰되지는 않고 제때 책상을 물린 후 삶의 다른 풍부함도 놓치지 않으셨을 거라고 말이다. “




매일의 끼니를 준비하는것, 내 손으로 음식을 만들어 나와 사랑하는 사람의 입에 들어가게 하는 일은 지난하지만 숭고한 노동이고, 세상의 속도를 벗어나 자신의 속도를 찾는 수련이며, 자연도 미래세대도 챙기는 일이다.




내 책장 한켠엔 박완서 칸이 있다.

책정리를 할 때도 이 책들만큼은 비우지 않았다.


자신을 끊임없이 돌아보며 내 안의 모순을 인정하고 자기 행동을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 자식들 뿐 아니라 독자에게도 따뜻한 어머니의 입김을 불어넣으려 애쓰는 사람, 현실을 직시하고 타인과 사회가 늘 좋아지길 바라는 사람, 그러면서도 자신의 보통의 삶을 그 누구보다 충실히 살아낸 사람.


번갈아 등장하는 모녀작가의 레시피에 미소짓고,

“입에 들어갈것을 정히 만들며 손끝에 힘을 주는 일” 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박완서 샘의 좋은 글은, 그 글에서 나오는 힘은 보통의 삶을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며 일상의 일을 내 손으로 충실히 한 사람만 가질 수 있는 어떤 것, 자기 삶에 책임지며 사는 사람의 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을 닮은 글이 나의 10년 뒤 20년 뒤엔 어떻게 읽힐지, 내가 글쓴이의 나이가 되었을때도 삶과 세상을 같은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을지 궁금하다.


생에서 좋은것이라고 언급했던 일들이 대단치 않아서 좋았다. 나도 해본 일이고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경험할 수 있는 일이어서도 좋다.


내 모순과 단점을 끌어안고 삶을 좀 더 진실하게, 그리고 뭘 하더라도 보통의 삶을 충실히 살아갈 용기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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