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푸에세이]결혼기념일과 빨간염소




어제는 곰과 결혼한지 9주년이 되는 날이다.



2012년 오늘, 이상한 기분과 걱정과 슬픔에 한숨도 못잔채 종일 굶으며 결혼’식’ 하느라 피곤했던 기억이 난다. 다시 결혼한다면 절대 그렇게 당사자는 하나도 안좋고 돈만 많이 드는 결혼식은 하고싶지 않다.


곰과 나는 대학원 여름 학술기행에서 만나 CC로 지금까지 참 오래도 함께했다. 연애 기간 4년에 결혼9주년이니 합치면 13년째 같이 지내고 있다.(징글징글😝)


처음 몇년은 결혼기념일이라고 여행도 가고, 멋진 레스토랑에도 가고, 선물도 안주면 서운해했었다. 곰이 우연히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의 니트를 사왔다가 내 반응이 좋으니 매년 니트만 선물하기도 했다. 올해도 곰이 너 좋아하는 옷 사라며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의 예쁜 옷들을 막 보여줬다. 아직도 보면 사고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버려진 옷이 산이 되고, 그걸 염소가 뜯어먹고, 온갖 염색에 독한 화학물질로 강이 오염된 것도 모자라 강 자체가 버려진 옷으로 가득해진 장면을 본 뒤에도 옷을 살 수는 없었다. 꼭 필요하지도 않은데 무슨 날이라고 사는것도 내키지 않았다.


맛있는거 사먹으러 갈까도 생각했지만 지금 특별히 먹고 싶은 것도 없고 김장김치 넣을자리 만들어야해서 묵은지 지져 먹었다.


이런 밋밋하고 쿰쿰한 결혼기념일이라니..ㅋㅋㅋ

웃음이 났다.



얼마 전 똑똑한 곰돌이님(정재승박사- 울곰은 뚱뚱한 곰돌이, 정재승 박사는 똑똑한 곰돌이 ㅎㅎ 우리집 암호같은(?)별명이다.) 인스타에서 아프리카에 빨간염소 보내는 걸 봤다.



아프리카 최빈국 아이들에게 염소를 보내면 아이들 영양과 이웃들에게까지 도움이 된다고 했다.


(잠깐 삼천포로 빠지자면…

육식도 덜 하고 지구상의 가축도 줄이자고 외치는 내가 염소를 보내도 되나? 다른걸 후원 해야하는게 아닐까? 잠시 생각이 들었지만 육식을 줄여야 하는건 영양실조에 시달리는 최빈국의 그들이 아니라, 공장식으로 살아있는 생명을 찍어내듯 만들어 매끼 고기를 밥상에 올리는 우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지역에 가축이 늘어나는 만큼이라도 우리가 줄여야 한다.)



결혼기념일에 염소한마리 보내자고 곰한테 말했다. 내가 하는건 뭐든 좋다고 해주는 곰이 그러자고 했다.



묵은지를 두 종류나 지져올린 쿰쿰한 저녁을 먹은 뒤 카페에 가서 작은 조각케이크 하나를 두고

우리만의 소박한 기념을 했다.


그리고 세이브더칠드런에 염소한마리를 후원했다.


기분이 묘했다.

우리의 좋은날에 다른 누군가에게도 좋은 일이 생긴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따뜻해졌다. 더욱이 불공정한 세계의 시스템으로 피해를 보고있는 죄없는 어린이가 통통해 질 수 있다니 참 좋았다.


조각케이크 하나두고 초도없이 보낸 9주년 기념일이지만 따뜻해진 마음덕에 그 어느때보다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다.


연애할 때와 결혼초, 그 날것으로 가득하던 우리를 생각하면 지금의 평온은 역시 시간이 만든건가 싶다.


매일 사랑한다고 말하고, 아직도 자기가 꼭 행복하게 해줄거라고 큰소리치는 곰이랑 서로를 위하고 감사하며 살아야겠다. 점점 더 좋아지고, 점점 더 이해하며, 점점 더 편안해지는 사람이랑 살아서 다행이다.


영국의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는 이런 말을 했다.


한사람 때문에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합니다. 한사람 때문에 하늘 위로 날기도 하고, 한사람 때문에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기도 합니다. 가까이에 있는 한사람이 믿음과 사랑으로 응원하면 그 다른 한사람은 바보라도 영웅이 됩니다.



믿음과 사랑으로 응원하는 그 한 사람이 나이면 좋겠다고,

나에게도 그 한사람이 곰이면 좋겠다고,

내가 먼저 그런 사람이 되어줘야 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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