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의 소설이었다. 애트우드의 필력에 대해선 익히 알고 있었지만 몰입감이 엄청났다. 600쪽이 넘는 책인데(전자책으론 900쪽이 넘음) 시간 가는줄 모르고 술술 읽혔다.
재미있었다.
처음엔, 누가 범인인가? 그래서 그레이스는 살인에 관여했다는건가? 안했다는 건가? 거짓말을 잘하는 사악한 살인자인가? 억울하게 누명을 쓴 피해자인가? 에 초점을 맞춰 읽었다.
그녀가 이야기해주는 과거 이야기엔 푹 빠져서 읽게됐다. 인물의 모습이나 건물, 자연풍경의 묘사까지도 생생했다. 가난하고 천한 신분이지만 고상함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소녀, 세상이 그녀에대해 궁금해하는 것을 나도 궁금해했다.
그런데 소설의 뒤로 갈수록 이 이야기는 어떤 살인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걸 깨달았다.
51p. 그중에는 죽도록 때리는 남편을 피해 입원한 여자도 있었는데, 미친 쪽은 그 남편이건만 그를 잡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52p. 자기는 집이 없는데 정신병원은 따뜻하니 가을만 되면 미친다고, 제대로 미친 척하지 않으면 얼어 죽는다는 여자도 있었다. 그러다 봄이 돼서 날씨가 풀리면 다시 정상으로 돌아와 숲 속을 방랑하며 낚시를 한다고 했다.
70p. 저들은 내가 필요로 하는 게 있으면 알아내서 악용한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170p.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항상 어릴수록 고분고분하다고 착각한다. 어머니가 정말 원하는 것은 사이먼이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며느리다.
729p. 남편한테 들통 나면 어쩌느냐고 한다. 늘 욕을 먹는 쪽은 여자인데.
731p. 그가 직접 조사한 바에 따르면 타락이 아니라 가난이 매춘의 원인인 경우가 더 많은데, 어쨌든 매춘부들은 고객의 상상에 장단을 맞춰 주어야 한다. 창녀는 실제로 어떻든 간에 욕망을 느끼는 척, 희열을 느끼는 척해야 한다. 그런 가식의 대가로 돈을 받는다. 싸구려 창녀가 싸구려인 이유는 못생겼거나 늙어서가 아니라 연기를 잘 못하기 때문이다.
371p. 어떤 사람들은 이걸 이브의 저주라고도 부르는데 자기가 보기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이브에게 주어진 진짜 저주는 무슨 문제가 생기자마자 그녀 탓으로 돌렸던 바보 같은 아담을 참고 견뎌야 했던 거라고 말했어요
839p. 남자들은 천성적으로 그리고 신의 섭리상 어느 정도 자유가 용인되지요. 하지만 여자는 정절이 필수 조건이랍니다.
<그레이스>는 살인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가부장적 남성중심 사회에서 살아가는 모든 ‘여성’에 대한 이야기였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두가 피해자였다.
나는 소설의 끝에 그레이스가 감옥에서 나와 처음으로 자기만의 이불을 만들며 세 여성을(낸시, 메리 휘트니, 그레이스)상징하는 무늬를 넣었을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여성을 돕는 건 늘 또 다른 여성이다.
그로부터 몇백년이 지난 우리시대의 여성은 어떤가?
드라마 <셜록> 에서 ‘인류의 역사는 여성차별의 역사와 같다’는 대사가 나온다. 그 말처럼 오래된 불평등은 21세기에도 그리 나아진듯 보이지 않는다.
<아무튼 언니> 의 언니들은 참 유쾌하고 멋지다. 이 책에 등장하는 범상치않은 언니들 이야기를 읽으며 친 언니도 없고 그리 친한 언니도 별로 없는 나는 부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런데 계속 읽다보니 이 또한 세상 모든 언니들, 즉 여성에 대한 이야기였다.
희생하고 헌신하는 엄마세대 여성의 이야기, 능력있어도 뜻을 펴지 못하는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에도 가슴이 아팠지만 경찰인 화자가 접한 여성범죄 이야기를 읽었을때 나는 화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하루종일 압수한 불법촬영물을 돌려보는 경찰, 그렇게나 많은 촬영물이 매일 들어오는데도 ‘결정적인 장면이 없다’ 는 이유로 처벌받지 않는 가해자,
✔️생각보다 많은 가족내 성폭력 사건엔 늘 오빠나 아빠를 두둔하며 피해자를 나쁜년 만든다는 부모가 있다는 사실,
✔️남편에게 맞아 보기에 처참할 정도가 되어 죽었는데도 ‘처음부터 죽일 고의는 없었다’ 는 이유로 치사죄를 적용하는 법원,
✔️이름모를 남자에게 스토킹을 당해 삶을 지속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을 당하고 있는 여성과 스토킹은 ‘경범죄’ 이기 때문에 가해자는 몇만원만 내면 끝이라는 거지같은 법.
✔️마른 몸을 좋아하는 전남편을 떠올리며 무리하게 다이어트를 하다 거식증에 걸려 끝내 생을 포기한 여성,
✔️가혹한 시집살이와 쌍둥이 독박육아에 시달리다 스스로 집에서 목을 맨 언니 등.
여성이라는 이유로 지워진 의무와 책임, 불평등, 약자이기 때문에 견딜 수밖에 없었던 일들에 분통이 터졌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운없는 몇몇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맞벌이 라는 말은 있어도 맞살림 이라는 말은 어색한 현실, 혼자 밤길을 걷기라도 하면 뒤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에 불안해하고, 늦은밤 택시라도 타게되면 서로에게 번호판을 찍어보내며 안전을 비는 이 시대의 우리 모든 여성에 대한 이야기였다.
너무도 공고한 남성중심의 카르텔은 그레이스의 시대 뿐 아니라 21세기에도 단지 여자로 태어난 운없음을 탓할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P. 157 이 나라는 아직까지 여성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운으로 치부한다. 남자를 잘못 만나서, 하필 그 길을 지나서, 왜 그 옷을 입어서, 여성들이 피해 입을 수밖에 없는 구조를 치밀하게 짜놓고도 피해 여성 개인의 운이나 노력만을 물고 늘어진다. 그렇다면 나는 이에 대항하여 모든 여성이 억세게 운이 좋기를 바란다. 사회가 운을 따진다면 여성들의 운이 겁나게 좋으면 해결될 일이다. 여성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로 스러진 생명이 수도 없다. (…)
지금껏 남성들은 운이 너무 좋았다. 자신에게 감정이입하여 죄인이 되지 않도록 힘써줬던 사법기관 구성원들을 만났고, 무조건적으로 관대한 각종 인사계 직원들이 있었으며, 무슨 일이든 남자에게 마이크를 넘겨주고 유리한 고지를 선점해주는 그들만의 카르텔은 철옹성보다 단단했다.
타격을 가한 사람이 늘 진짜 범인인것은 아니다!
그레이스가 한 말이 번뜩 떠올랐다.
아내를 때려죽인 남편을, 성폭력범을, 성착취동영상을 찍고 유포하는 문화를, 자살하는 아내를 만들어내는 것은 악한 개인뿐 아니라 거지같은 구조다.
결혼을 하고 나이가 들면서 나는 엄마가
“ 다음 생애에 다시 태어나면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 “ 고 하던 말이 무슨말인지 이해하게 됐다.
나도 그러고 싶다고 생각한적이 있다.
그러나 다신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것이다.
다음 생애가 되도록 남자가 유리한 세상을 남기지 않을것이다. 여성을 피해자로 삼는데 너무 익숙해져버린 이 사회를 ‘그건 이상한 일이라고, 틀렸다고’ 낯설게 만드는 일에 종이 한장 만큼이라도 무게를 보탤 것이다. 이미 여자로 태어난 바, 내가 살아온 그리고 살아갈 세상에선 여성들이 손톱만큼이라도 더 나은 삶을 살도록 애쓸것이다.
연대하고 거부하고 할말은 하며 내 주변의 작은 것부터 바뀔 수 있도록 싸울것이다.
그리고 남성중심 사회에 살면서 나도 모르게 내 안에 단단히 박힌 관념을 끊임없이 깨는 일을 먼저 할 것이다.
먼시간 뒤에 이 작품을 읽는 여동생들은 그건 현재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옛날엔 여자들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감상평을 남기게 되길 희망한다.
이제 여자들이 운 좋을 차례다.
P. 158 이제 여성들이 운 좋을 차례다. 여성들의 운수좋은 사회를 위해 나 또한 진심으로 노력할 것이다. 나를 억세게 운 좋은 동생으로 만들어준 언니들의 노력과 희생을 떠올리면서. 어디선가 홀로 울고 있을지 모를 동생들을 위해서라도.
완전히 돌아버려야만 똑바로 설 수 있는 팽이와 같은 세상에서 성실과 진심의 가치 따위, 씨알도 안 먹힐지 모른다. 이렇게 살아질 바엔 그냥 사라지는게 낫다는 생각이 치밀어 오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 쓰러지지 말자. 우리가 맞잡은 손이 끝없이 이어져 언젠가는 기쁨의 원을 그릴 수 있도록 서로가 운이 되어주자. 세상이 심어준 혐오와 수치 대신 서로의 용기를 양분 삼아 앞으로 나아갈 우리는 설렁탕을 먹지 않아도 충분히 운수 좋은 날을 맞이할 것이다.
덧,
<그레이스> 는 넷플릭스에 영화화된 작품도 있다. 정말 원작을 잘 살려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만큼 수작이다. 캐스팅도 찰떡이라는 생각이 든다. 소설과 함께 보길 강추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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